[오소이치] 어떤 습관| # OSOMATSU 2016. 6. 8. 19:29
“전화가 왔어.”
밑도 끝도 없이 던지는 말이다. 저런 화법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지만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 의아한 눈을 하고 이치마츠를 바라보자 이쪽은 태평하게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다. 뭐가? 멍한 목소리를 내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본다.
“엄마한테.”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아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네가 숨을 한 번 들이키더니 입을 뗀다. 형, 또 선 들어온 거 거절했다며. 작게 달싹이는 입술에 어렴풋이 상황파악이 됐다. 저번 주쯤에 엄마한테 좋은 아가씨가 있으니 선을 보라는 압박이 있었다. 당연히 거절했지만.
“나보고 얘기 좀 잘 해보래.”
이치마츠를 그저 장남이랑 유독 돈독한 사남 따위로 알고 있는 엄마는 나를 설득한답시고 얘한테 연락한 모양이었다. 씨발. 그거 전혀 잘못 짚으셨는데요, 어머니. 다시 또 말이 없어진 이치마츠의 얼굴을 바라봤다. 힐난의 기색이 하나도 없는 눈이 불편하다. 한참 말이 없던 이치마츠는 대뜸 리모컨을 들어 티비 전원을 끄더니 내 무릎 위로 어기적어기적 올라왔다.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형 선 볼 거라고 말했어.”
그렇고 말하고선 내 목에 팔을 감아 입을 맞춰온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입맞춤에 네가 무슨 감정을 실었을지 짐작이 안 간다. 한숨을 삼키며 이치마츠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나는 10년째 네가 너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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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습관
written by. 르헨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바닥에 널브러진 구급상자와 이치마츠의 손목에 어설프게 감겨 있는 붕대였다. 구급상자 근처엔 채 닦지 못한 핏 자국이 몇몇 개 보였다. 이치마츠가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있던 이불을 살짝 끌어내리자 보이는 눈두덩이 붉다.
“이치마츠.”
나직이 이름을 불러도 미동 하나 없었다. 아마 잠든 지 얼마 안 된 거 같았다. 버석하게 마른 볼에 손등을 얹었다. 소금기가 달라붙은 볼을 어루만지는 게 몇 번째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포스트잇에 간단한 말을 적어 침대 머리맡에 붙였다.
「밥 먹고 꼭 약 발라.」
십 분을 넘게 고민한 것치고 간결한 문장이었다. 더 이상의 위로 비슷한 것도, 혹은 화 같은 것도 적어내지 못했다. 이건 오래전부터 굳어진 습관이었다. 아직 출근 시간까지 여유가 있는 걸 확인하고선 물을 떠다 침대 옆 협탁에 두고 앞머리가 달라붙은 이치마츠의 이마에 손을 댔다. 가느다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끝부분이 붕 떠 있는 포스트잇을 바라봤다.
사랑해.
사실 그 말을 정말로 쓰고 싶었는데, 나는 그게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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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마츠와의 관계는 주로 피상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겁내는 것, 가장 가까운 가족들에게 습관적으로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 애인 있냐는 물음에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는 것, 그런 비슷한 것들. 이유는 간단했다. 천천히 눈을 들어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비친 얼굴을 바라봤다. 딱 10년 전에, 그러니까 너랑 내가 18살이었을 때. 그때부터 사랑하게 된 너는 나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서류가방을 쥐고 있던 손바닥을 펴서 그 아래에 있는 손목이 멀끔한지 확인했다. 손끝에서 피가 빠져나갔다. 이치마츠의 습관처럼 손목을 슥슥 어루만졌다. 우리도, 처음부터 이러진 않았다.
「오소마츠, 있잖아…….」
뭐가 그리 불안한 건지 책상 위에서 한시도 가만히 두질 못하던 손을 기억한다. 할 말이 있으니 밖에서 따로 보자고 비장하게 말하기에 무슨 사고라도 친 줄 알았다. 따로 보자고 말하던 얼굴이 너무 절박해서, 낙제 과목 보충수업까지 짼 참이었다. 품이 한참 남는 이치마츠의 교복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한참 동안 빈 교실을 메웠다. 그래서, 대체 뭔데? 더운 날씨 때문인지 금방 바닥난 인내심에 5분 넘게 뜸만 들이고 있는 이치마츠에게 면박을 주려던 순간이었다.
「나 형 좋아해.」
「……뭐?」
순간 어이가 없어서 혀를 씹을 뻔했다. 얼이 빠진 표정으로 되묻자 이치마츠가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놓는다. 이치마츠가 불안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이치마츠를 바라봤다. 좋아한다는 말은 어디까지나 가족들끼리도 그냥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봐도 그런 의미가 아닌 것 같아서 문제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할 말을 찾는데 이치마츠 쪽에서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도 괜찮아, 형.」
이치마츠는 나에게 고백함으로써, 전부 정리할 예정이라 했다. 이치마츠는 몇 번이나 나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다행인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럼. 군더더기 없는 내 목소리에 이치마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육 쌍둥이 이상의 특이점을 만들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냥, 그냥. 어떻게든 평범해 보려고 애썼던 게 우리 형제 아니었던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잘 된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한철 감정일 게 뻔하고, 설령 나랑 합이 맞아서 잘 됐다고 해도 절대 좋게 끝은 못 봤을 게 훤했으니까.
그러니까 잘 마무리된 거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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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쫌. 토도마츠.」
평소랑 같은 식사 시간인데 유독 옆에 앉은 토도마츠와 손이 자주 맞부딪쳤다. 참고 참다 젓가락으로 집고 있던 반찬을 세 번 떨어트렸을 때 짜증 섞인 목소리로 토도마츠를 부르자 그쪽에서도 참고 있었던 건지 바로 톡 쏘는 대답이 튀어나온다.
「그야 형은 오른손잡이고, 나는 왼손잡이니까. 별수 있나.」
그러게, 이치마츠형은 왜 나한테 자리를 바꾸자고 해서.
토도마츠가 작게 투덜거리는 말에 젓가락질하던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밥 먹을 때 항상 옆자리는 이치마츠였던 것 같다. 그렇게 의식하자 다른 것들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 전 둘씩 화장실에 들어가서 양치할 때면 늘 이치마츠가 옆에 있었다던가, 우리 반 종례가 유독 늦게 마치는 날엔 이치마츠만 기다려줬다던가, 그런 것들. 이제는 이치마츠 쪽에서 전부 때려치웠지만. 하나하나 곱씹을수록 이상하게 가슴이 내려앉았다. 가령, 내 기억 속의 이치마츠는 늘 오른손으로 젓가락질했다. 그게 퍽이나 서툴렀는데 그냥 원래 젓가락질을 못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씨발, 얘는 원래 왼손잡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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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쪽에서 이상하게 안달이 났다.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에 대한 뒤늦은 심술은 아니었다.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다. 식사할 때 나랑 제일 떨어진 자리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왼손을 쓰는 모습이 명치에 턱 걸린 듯했다. 얘는 눈에 띄게 나를 피했다. 우연이라도 나랑 부딪히지 않으려 애쓰는 이치마츠를 보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그날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하던 목소리를 사랑하게 된 거라고.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지? 어느 쪽으로 가든 끝이 보이는 길이었다. 그 중 더 괜찮은 길을 고르자면 단연 서로 묻고 형제로 잘 지내는 쪽이었다. 그런데 18살은 감정의 충동질에 너무 미숙해서, 그런 것 따위 안 보이는 척 눈을 꾹 감았다.
「이치마츠. 나도 너 좋아해.」
이치마츠가 나한테 고백한 지 꼭 2달째 되던 날이었다. 접때랑 똑같이 빈 교실에서, 이치마츠는 품이 큰 하복 대신 춘추복을 입고. 침묵만이 교실을 감돌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치마츠는 눈을 내리깐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은 내가 얼마나 형을 좋아하는지 몰라. 덤덤한 목소리로 시작했던 게 끝으로 갈수록 덜덜 떨렸다.
「정리하려고 했어. 속이 곪으면 솎아내고, 그래도 또 곪으면 또 솎아내고, 그러다 아예 뻥 뚫려버리면. 차라리 그게 더 괜찮을 거라고.」
흐느낌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이치마츠는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그러니까 형, 어중간하게 메우지는 말아줘. 나 그러면 진짜 죽어버릴 거야. 몇 번이나 발음을 씹으며 말을 쏟아내는 이치마츠를 달래며 나는 몇 번이나 알겠다고 대답했다. 당장은 확신할 수 없어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내가 이치마츠에 비해 모자란 부분은 당연히 존재할 테지만, 그건 차차 채워나가면 되는 거라고.
근데 그건 된다 안 된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이치마츠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에는 나를 두렵게 하는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치마츠가 남자인 것, 그걸로 모자라 한배에서 나온 형제인 것. 그로 인해 따라오는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은 생각보다 훨씬 감당하기 버거운 것들이었다.
이치마츠는 그게 아니었다. 얘는 나를 두고 다른 어떤 걸 잃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끝끝내 그러질 못했다. 그런 나 때문에 이치마츠는 많이 울었다. 처음 몇 년은 나에게 자신과 비슷한 사랑을 해주길 바랐다. 똑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다음 몇 년은 서로의 방식을 이해한 척했고, 이제는……서로를 저며내기만 한다. 이치마츠가 선 같은 거 보지 말라고 내게 화내는 대신 손목을 그은 것처럼. 그런 네게 내가 사랑하는 건 너니까 괜찮다, 고 달래주는 대신 형식적인 걱정만 적어낸 것처럼. 우리는 서로에게서 붕 뜬 채 부유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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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는 1주일쯤 뒤로 잡을 테니 그렇게 알아두렴]
낮에 엄마에게서 온 문자를 곱씹으며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사실 선을 보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떠밀려 나간다더라도 그 자리에서 끝내면 그만이니까. 어른들 손에 끌려갈 만큼 어리숙한 나이는 아니었다. 문제라면 이치마츠였다.
“이치마츠, 얘기 좀 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쇼파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이치마츠를 불렀다. 무릎을 세워 안고 있던 이치마츠가 내 목소리에 시선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말라서 뼈가 툭 튀어나온 무릎 위에 얹어진 손엔 아침의 것과 똑같이 붕대가 헐겁게 감겨 있다. 약 바르라니까, 말은 또 씨발 좆도 안 들어요. 한숨을 푹 내쉬고 방에서 구급상자를 들고 와 이치마츠 옆에 앉았다. 손 이리 내. 너 밥도 안 먹었지? 질책하는 말에도 이치마츠는 제 상처를 소독하는 내 손만 바라봤다. 벌겋게 벌어진 상처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다시 감는 동안 말 한마디 없던 이치마츠가 가까스로 입을 열고서 한다는 말 꼬라지가 가관이었다. 형, 선 봐.
“너 진짜 왜 그래?”
“형이야말로 왜 그래?”
나는 이치마츠의 이런 식의 고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얘는 왜 자꾸 자기를 좀먹는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사실 그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닌데, 씨발, 내가 병신같이 구는 것도 조절이 안 되는데 얘가 삐딱하게 구는 것까지 내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몇 년을 덧대어 왔다. 얘 손목에 흉터가 늘어간 것처럼.
“형은……형이 결혼 안 할 것 같아?”
이치마츠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묻는다. 나는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내가 좆나 겁쟁이는 맞지만, 그래도 나도 똑같이 너를 사랑한다고. 널 두고 결혼할 일은 없다고. 그리고 그게 내 진심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씨발, 사춘기 애새끼처럼 입이 맘대로 안 놀려진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
“선 볼게.”
우리는 서로를 저며내는 게 가장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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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뒤로 이치마츠랑은 어떻게 됐냐고 하면, 그냥 평소랑 똑같이 지냈다. 이게 진짜 우리가 더럽게 꼬인 점이었다. 서로 아무리 좆같이 굴어도, 그래도 씨발, 관계가 끝난다고 생각하면 겁부터 났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또 지내는 거다. 각자 곪아 터진 속을 끌어안고.
선을 보는 당일인데도 이치마츠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심지어는 형 그 넥타이 안 어울려, 다른 거로 매. 이딴 지적까지 했다. 하지만 저게 다가 아니란 건 알고 있다. 오늘 아침엔 좀 일찍 일어나서 욕실에 있는 면도칼과 주방에 있는 칼을 전부 치웠다. 칼 대신 플라스틱으로 된 과도를 서랍에 넣다 말고 실소가 터졌다. 왜 이렇게 됐지, 정말.
선 자리는 그냥 평범했다. 엄마가 그렇게 호언장담한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얼굴도 적당히 반반하고 집안도 괜찮고 성격도 서글서글해 보였다. 어디 가서 애프터 못 받진 않겠구만. 나한텐 못 받겠지만. 서로 대충 형식적인 질문을 하며 시간을 때웠다. 처음엔 눈에 띄게 관심을 보이던 여자도 내 쪽에서 전혀 흥미가 없다는 걸 눈치챈 건지 점점 심드렁해졌다. 엄마한테 한 소리 듣겠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오늘 즐거웠어요. 형식적인 인사를 마무리로 자리를 정리했다.
저녁 식사를 마친 시간이라 그런지 벌써 어둑했다. 꽉 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집에서 나올 때부터 계속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이치마츠는 이상한 부분에서 미련했으니까. 혹시라도, 씨발, 애먼 짓 했을까 봐. 그렇게 걱정되면 애초에 이딴 식으로 고집 안 부리면 되는데 그게 안 되는 나도 진짜 병신이다.
“이치마츠?”
문이 잠겨 있는 게 이상하다 했더니 집에 들어와도 이치마츠는 보이지 않았다. 이치마츠는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잘 없었다. 피가 하얗게 식었다. 자켓을 벗지도 않고 무작정 옷장을 헤집었다. 비는 외출복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냥 집 앞 마트를 간 걸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믿으려던 찰나에 내 옷장에서 셔츠 하나, 넥타이 하나가 비는 걸 발견했다. 아침에 내게 안 어울린다며 퇴짜를 놓은 그 넥타이였다. 심보하고는, 씨발. 옷장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다시 신발을 신었다. 분명한 기시감이었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나?
“형, 어딜 그렇게 나가.”
그래, 괜한 기시감이 아니었다. 문을 열고 뛰어나가려는 순간 현관 바로 앞에서 이치마츠와 마주하자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내가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한테 유독 관심을 보이던 입사 동기가 있었다. 이쪽에선 나름 쳐낸다고 쳐냈는데 그거로는 모자랐는지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건지 그게 꽤 오래 갔다. 이치마츠한테는 티를 안 낸다고 안 냈는데 갑자기 그쪽에서 줄 게 있어서 집 근처에 왔다며 한밤중에 불러내는 통에 다 뽀록났었지 아마. 뭐 그리 급한 건가 해서 갔더니 준다는 게 어느 지역의 유명한 케이크. 너무 수작질 아닌가? 짜증을 감추지 못한 채 잘 포장된 종이가방을 들고 집으로 들어서는 나를 이치마츠는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무던하게. 거기다 대고 뭐라 변명하는 꼴도 우스워서 대충 부엌에 던져두고 말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이치마츠가 사라졌다. 종이가방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두고. 그때는 오늘처럼 현관에서 바로 마주치지도 않았다. 온 동네를 뒤집고 나서 체념하듯이 집에 다시 돌아왔을 때 쇼파에 태연하게 앉아있던 꼴을 봤을 때 심정이란. 그래. 그때 이치마츠는…….
“너 남자 만났어?”
나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내가 그러든 말든 이치마츠는 태연하게 넥타이를 풀면서 나를 지나쳐 집 안으로 들어간다. 얘 진짜 사람 속 잘 뒤집는다. 순간 야마 돌 뻔한 걸 참고 이치마츠의 손목을 잡아서 돌려세웠다. 실수로 붕대를 감은 손목을 잡은 건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이치마츠는 잔뜩 흐트러진 나를 훑어보더니 가볍게 웃으며 입을 뗐다.
“형, 게이는 원래 남자 만나.”
그렇게 말한 이치마츠가 내 손을 뿌리치고선 넥타이를 아예 끌러 바닥에 던진다. 찬찬히 셔츠도 벗어내는데 상체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몇 개 보였다. 난 진짜 쟤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씨발, 더럽게 어렵다. 울컥해서 새된 소리로 다그쳤다.
“너 또 왜 그래?”
“……그러게.”
이치마츠가 웬일로 반문을 안 한다. 평상시라면 형이야 말로 왜 그러냐며 남의 속을 뒤집어 놓고도 남았을 텐데. 순간 말문이 막혀서 이치마츠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치마츠에게서 술 냄새가 진탕 난다. 너 술 마셨어? 하고 묻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
“누구랑.”
“몰라. 어디서 만난 누구겠지.”
그렇게 말한 이치마츠가 어기적어기적 걸어와서 나한테 안긴다.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축 늘어지기에 허리를 잡아주자 얘가 씩 웃는다. 뭘 웃냐. 어이가 없어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툭툭 인상을 찌푸리던 이치마츠가 내 목을 꼭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이치마츠는 일순 물 먹인 솜 같은 목소리를 냈다.
“형이랑은 꼭 모래성을 쌓는 거 같아.”
“…….”
“어차피 무너질 걸 아는데…….”
둘 다 미련해 빠져가지고. 뒷말은 거의 중얼거리다시피 한 이치마츠가 눈을 스르르 감는다. 아마 잠든 것 같았다. 너는 잠이 참 잘도 온다. 한숨을 푹 내쉬고 이치마츠를 안아 들어서 침대까지 옮겼다. 잠옷으로 대충 갈아입히고 이불을 덮어주는데 핏물이 밴 붕대가 눈에 띈다. 아마 아까 내가 세게 잡아서 상처가 터진 모양이었다. 쯧. 혀를 차고 구급상자를 꺼내와 붕대를 갈았다. 너덜너덜해진 헌 붕대를 버리며, 생각했다. 우리는 내일 또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거라고. 선 같은 건 본 적도 없는 것처럼. 얘 몸에서 어떤 흔적을 본 적도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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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방식으로 또 서로를 저며내고, 그 틈새로 사랑이라 말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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